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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상식2017. 6. 29. 14:43

-6.25 최악의 악몽 장진호 전투에 대해서


‘한미동맹 새로운 상징’ 장진호전투기념비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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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장진호전투기념비를 찾은 것은 한국 대통령으로서의 첫 방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무엇보다 문 대통령의 부모가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부산으로 피난 온 피난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당시 흥남 철수를 가능케 한 미군 제1사단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문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란 명제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은 문 대통령이 첫 일정으로 장진호전투기념비 헌화를 잡은 이유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임 후 미국을 처음으로 찾은 문 대통령과 미국의 인연을 부각하는 중요한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 있어서다. 앞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6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장진호 전투기념비에 헌화하는 것은 한미동맹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문 대통령의 가족사와도 연결되는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미 예비역 해병들은 전투가 벌어진 장진군 고토리에서 눈보라가 그친 밤에 밝은 별이 뜬 것을 신호탄으로 포위망을 뚫은 것을 기리고자 ‘고토리의 별’을 그려 넣은 배지를 달고 있다.

이 ‘고토리의 별’이 공식 기념물로 형상화된 것이 바로 장진호 전투기념비다. 

기념비는 8개의 판으로 둘러싼 2m 높이의 팔각형 기단 위에 장진호 전투를 상징하는 ‘고토리의 별’을 올린 형태다. 기단부 정면에는 장진호 전투를 설명하는 판이 있고, 나머지 7개 패널에는 장진호 전투의 지역별 세부 내용이 설명돼 있다. 

기념비 건립비용(60만 달러, 한화 약 6억8,000만 원) 중 3억 원을 우리 정부가 지원했다.


오늘 뉴스에 난 장진호전투기념비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장진호 전투가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장진호 전투란 1950년 11월 26일 ~ 1950년 12월 13일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UN군과 중공군사이에서 펼쳐진 전투입니다.중공군은 UN군을 포위 섬멸에는 실패하였으며 10배가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나 UN군을 후퇴시키는데는 성공해서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뒀고 UN군은 포위섬멸을 뚫고 후퇴에 성공했습니다.

중공군의 전술적 승리이며 미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불리더군요.


나무위키에 등제된 장진호 전투 내용 입니다.

장진호 전투란 6.25 전쟁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입니다. 

특히 세계에서는 '현대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초로 맞붙어 싸운 전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사건입니다. 

독일군과 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또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꼽히는 전투입니다. 

게다가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어로는 “Battle of Chosin Reservoir"

미국 입장에선 해병대뿐만 아니라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전투입니다. 

미군이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투력 소멸 상황에 빠진 건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실제로 장진호 전투 초반시점에서 서부전선의 미8군지역에 있던 미2사단은 중공군의 작전으로 군우리에서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수많은 전투에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중공군의 포위기동으로 부대가 와해된 사례는 많이 있고 장진호 전투에서도 대표적으로 호수 동쪽에 있던 미7사단 31보병연대와 하갈우리를 증원하려했던 영국해병특공대(드라이스데일 임무부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그 규모가 연대급까지였고 이 당시 미2사단은 사단 자체,전체가 붕괴했습니다. 

이것은 책 콜디스트 윈터와 2013년에 나온 한국전쟁 서적 'Korean war 한국전쟁/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왕수쩡 저,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자세히 묘사되는데 두 책의 내용중 미2사단이 군우리에서 섬멸된것에 대해 각각 미군과 중공군 시점에서 서술된 자세한 내용이 많다. 간단히 요약하면 중공군은 미2사단의 퇴각로를 어떻게 차단시켰으며 봉쇄했는지, 미군은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있습니다. 

사실 그전에 이미 미2사단은 지난 며칠동안 중공군의 2차대공세의 전개로 수천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군우리에서 탈출할 때 다시 수천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사단이 보유한 중장비와 화포, 물자를 거의 모두 잃었습니다.

사단의 후위에서 엄호하던 1개 연대와 배속부대만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처참한 피해와 졸전으로 미군 수뇌부는 미2사단을 해체 시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만약 중국군이 2차대전 당시 독일군 정도의 기동력과 공군력이 있었다면 미 해병대는 전멸했을 것이다고 하는군요.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만 5천명 중 전사상자가 4천명이 넘어갈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나머지 병력도 죄다 동상. 미군이 치른 대규모 현대전 중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치른 셈입니다. 

전사 700명, 실종 200명, 부상 3,500명, 동상등 비전투 손실 6,200명. 동상자의 1/3은 바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기대에 비하면 미군의 피해는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해병 1사단을 전멸시킬 생각이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포위하였던 중공군 6개 사단을 작살내고 함흥으로 행군하여 빠져나갔습니다.

장진호에서 해병대와 교전한 중공군은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6~7개 사단입니다. 

6개 사단까지는 확실하고 7번째 사단부터는 불분명한 감이 있습니다. 

해병1사단장은 "사단이 7개 중공군 사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고, 다른 3개 사단에 대해서도 부분적 타격을 입혔습니다"라고 해병 사령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반면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10월 15일~12월 15일 중에 전사 2만 5천, 부상12,500명이 발생했습니다. 팽덕회는 12월 8일 모택동에게 보낸 전보에서 중공군 9병단에서 6만명의 보충병이 필요하다가 알렸습니다.

이 전투에서 최소 6개 사단을 투입했지만 미 해병대를 완전히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며, 미 해병대와 격전을 이어가는 바람에 10군단의 다른 사단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미군은 중국군보다 더 좋은 무기와 압도적인 물자 지원,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중국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강요한데다가 북한의 강추위에 의해 대부분의 전력이 전투 후 동상으로 인해 발이 묶였습니다. 

게다가 국공내전의 경험 때문에 보급 부대의 중요성을 망각한 바람에 현지 물자를 징발할 수 없는 가난한 북한의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보급 상황은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져서 불필요한 희생을 늘렸습니다.

참고로 중국군의 보급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나 하면, 3일 동안 먹은 것이 얼어붙은 날감자 2개라든지, 수문교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이 극심한 추위에 얼어붙어서 항복하려고 총을 버리려고 해도 총이 얼어붙어서 손에서 안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열악한 보급으로 전투는 커녕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요지의 중요성과 방어진지의 견고함에 비해 의외로 미군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쑹스룬 장군은 직접 향후 보급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해병사단의 사단본부가 있던 하갈우리 전투에서 중국군의 화력이 1선 병사에게 집중되고, 방어선 내부에 있던 보급품 집적소의 연료나 탄약에는 별로 사격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중국군의 기본 보급 방침도 있었고, 만일 연료나 탄약에 사격해서 불바다를 만들면 당장 이길 수는 있지만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물자가 없는 미군 포로와 중국군이 함께 사이 좋게 굶주리고 얼어죽을 것을 우려한 것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여하간 이 때문에 중국군은 더 이상 미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결국 흥남 철수를 허용하게 됩니다. 

더불어 이 작전에 참여한 중공군 제9병단은 재편성 및 보급을 위해 한동안 최전선을 떠나게 되며, 총계 10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후방에 잔류하게 됨으로서 중국군의 차기 작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1.4후퇴등 주요한 작전에는 아예 빠지고 51년 3월에야 전선으로 복귀합니다. 

만약 제9병단이 멀쩡하여 제 13병단과 함께 좌우 원투 펀치를 날렸으면 과연 UN군이 어디까지 후퇴 했을지 예상 하는 것 조차 두렵네요.

또한 중국군 수뇌부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하고 더 이상 전쟁을 끌어봤자 미국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전쟁 전 북한의 영토를 유지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보급 부대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려서 상부에 보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판단, 현지 사령관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면서 대대적인 남진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1.4 후퇴 이후 연합군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큰 피해를 입습니다. 

이후 양자 모두 더 이상 상대를 섬멸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휴전협상으로 이어집니다.

한편 중공군의 전력 및 한국전 개입 가능성에 대한 오판, 군우리에서의 참패, 서울을 빼앗기고 평택까지 후퇴하는 등 맥아더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맥아더는 즉각 중국 연안을 해상 봉쇄 하고 중국 산업시설을 폭격이나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며, 장개석 군을 중국 본토로 상륙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워싱턴 정부는 이를 중공군에 패배하여 당에 떨어진 자존심과 명성을 회복하려는 무모한 기도라고 판단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51년 1월 28일 맥아더는 수원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만나며 기자들 앞에서 확전을 의미하는 발언을 일삼았으며, 거듭된 워싱턴 정부의 언론 플레이 자제 요청을 무시하였습니다. 

이어 3월 24일에는 워싱턴으로 부터 받은 비밀 전문을 "지금이 휴전협상을 개시하기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언론에 알렸으며, 4월 5일 맥아더가 다시 장개석군을 투입하여 확전해야 한다는 서한이 미하원 의회에 공개되는 바람에 이에 빡친 트루먼 대통령은 4월 11일 그를 파면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트루먼이 사적으로 밝힌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이자 극동지구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지. 자신이 미군의 총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일개 장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에 앞서 50년 12월 23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임명된 육군 참모차장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26일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아몬드 제10군단장을 불러 제10군단이 제8군에 예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잘못된 지휘 체계를 이제야 바로 잡은 것입니다.

이후 아몬드는 군단장으로 반년 더 유임되었고 유엔군의 재반격시기에 북한에서 철수를 최소의 인적 및 물적 손실만으로 성공시킨 공로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나 진급은 그게 끝이었습니다. 

그는 1951년 상반기에 있었던 굵직한 전역, 전투에서 제10군단장으로 지휘를 했고 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해가던 51년 7월 이임되어 미 본토의 육군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 전역했습니다. 

그에 반해 장진호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한 스미스 소장은 대장 예편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11월 한국전쟁에 중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 미군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긴 전투 중 하나입니다. 중공군과 미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나 인터넷에 등제된 곳마다 조금씩 다른데, (ex)미군은1만, 중공군은 10만이상) 미군은 3만(해병대 1만+한국군, UN군), 중공군은 6~7만정도 되지 않았을까라고 나무위키에서는 추측하더군요.


1:10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수적인 열세에서 좁혀오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적화통일을 막아준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Posted by Joseph514